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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2. 12世 〉17. <부정공>통덕랑공휘협묘갈명(通德郞公諱莢墓碣銘)
1. 문헌 목록 〉12. 12世 〉19. <광양공>암배숙부인성산이씨묘갈명(巖配淑夫人星山李氏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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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광양공>절충장군훈련원판관휘암묘갈명(折衝將軍訓鍊院判官諱巖墓碣銘)
절충장군훈련원판관휘암묘갈명(折衝將軍訓鍊院判官諱巖墓碣銘) 인조(仁祖) 병자년에 북쪽 오랑캐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포위하여 종묘사직(宗廟 社稷)이 위태롭게 되자 몇몇 대신들은 화의(和議)를 주장하였으니 이는 백성과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삼학사(三學士)의 척화(斥和) 충의(忠義)는 죽음으로써 항거하여 도 (道)를 이루려고 하였으니 이는 국가와 흥망 사생을 같이 하고자 함이니 새삼 시비를 논할 바 아니다. 공은 비록 무부(武夫)로서 수문장(守門將)의 직에 있었으나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자는 조판관(趙判官) 한 사람뿐이었다. 공의 휘는 암(巖)이요 옥천인(玉川人)이다.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휘 장 (璋)을 시조로 하고 판도판서(版圖判書) 휘 홍규(洪珪)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휘 전(佺)을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 휘 원길(元吉)은 정포은(鄭圃隱) 운정(芸亭) 설장수(偰長壽) 등과 같이 어지러움을 바로잡아 반정(反正)하여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였다. 그 공으로 옥천부원군에 책훈(策勳)되었으니 시호(諡號)는 충헌(忠獻) 호는 농은(農隱)이시다. 四남을 두셨는데 판서 영(瑛)은 호가 요재(樂齋)요, 부정(副正) 유(瑜)는 호가 건곡(虔谷)이요, 근(瑾)은 현감을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염(琰)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만호(萬戶)와 절제도위(節制都尉)를 지내셨다. 현감의 아들 개보(介甫)는 행군수(行郡守)요 아들 계겸(季謙)은 사직(司直)이며 군수 학세(鶴世)와 참봉(參奉) 상(祥), 동증추(同中樞) 세우(世璃)는 공의 고조 증조 조고(祖考)이다. 아버지의 휘는 명(命)인데 장사랑(將仕郎)이요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제충신(考悌忠信)이 남달랐다. 입신양명(立 身揚名)하여 부모님을 영화롭게 해드리고자 마침내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오래지 않아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파천(播遷)하게 되었는데 공이 호종(扈從)하여 나라 일에 진력하셨으니 이는 열탕(熱湯)에 들어간 것과 같고 날카로운 칼날을 밟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적군의 기세가 창궐(猖獗)하여 나라의 운명이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였으나 구원병이 없었다. 그래서 체찰사(體察使)가 성을 지키기 위하여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청주(淸州)에서 아군이 패하기에 이르러 임금이 남한산성을 내려가 항복하고 화맹(和盟)을 맺었으니 공은 한 무관(武官)으로서의 통분을 금하지 못하였다. 북쪽 오랑캐가 물러간 후에 공은 훈련판관(訓練判官)에 제수되고 원종훈(原從勳)에 녹훈(錄勳)되었다. 배위(配位)는 성산이씨(星山李氏)이신데 二남一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계상(繼尚)과 계생(繼生)이요 딸은 김명득(金命得)에게 출가하였다. 계생은 벼슬이 가선대부(嘉善大 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요 계생의 아들 필준(弼俊)은 부호군(副護軍)이며 차 자(次子)는 인의(仁儀)이다. 필준의 아들은 운재(運載)요 운재의 아들 중신(重新)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이시다. 아, 공께서 왕을 호종(扈從)한 충성은 거센 바람에도 쏠리지 않은 풀처럼 꿋꿋하셨으니 만약 선비의 신분으로 있었더라면 삼학사와 같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절의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화의를 주청한 대신들처럼 의를 저버리고 살기를 도모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공의 효행과 수신제가(修身齊家)한 드리는 이런 위국충절로 미루어보아 가히 상상할 수 있겠다. 본디 묘비가 있었으나 마멸(磨滅)이 심하여 十二대 후손 상훈(尚勳)이 다시 고쳐 세우려고 나에게 묘갈명 지어주기를 청하므로 모른 체 할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옛날 병자호란 때 임금이 위태로운 성안에 계셨네. 念昔虜亂 王在危城 몰아치는 비바람에 해의 광명 어두워졌네. 風雨晦冥 日月光明 한 무관의 충성심 임금을 호위하여 따랐는데 武夫腹心 御駕扈從 화의가 이루어져 수고한 보람 없었네 和議一定 賢勞無功 저 순창의 귀암산 옆을 바라보노라면 睠彼壽莊 龜巖山側 이 비문을 보는 자들 반드시 공경을 표하리. 片石堪語 過者必式 乙丑(一九八五)十月七日 豊壤後人 趙南赫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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